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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의 다양한 소식을 전하는 아미입니다!
오늘은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과 미 제40사단의 참전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미 제40사단의 실제 전쟁계획과 작전준비에 미 제40사단이 참여하게 된 사연은 평시 교육훈련과 다르다.
전쟁사교육은 이러한 격차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미 제40사단의 한국전쟁 파병 이야기는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미 육군 내부 문서 ‘보병 40사단 해외주둔 이동 문제’를 통해 그 이야기를 살펴본다.
미 제40보병사단은 전쟁과 동시에 병력 파견을 준비했다.
미국 제40보병사단(이하 제40보병사단)은 우리나라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부대이다.
1945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1952년 공산군과 싸우기 위해 군대가 한반도에 파견됐다.
한국전쟁 당시 최전선의 양구지역은 작전책임지역으로 펀치볼, 단장능선 등 치열한 전장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1970년대까지 주둔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였습니다.
한반도 파병 경험이 있는 제40사단은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부터 참전을 논의해 왔다.
1950년 9월 1일, 미국 연방정부의 부분 동원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최전선으로 떠날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 초기 한반도에 파병된 미군 부대는 최소한의 훈련과 즉시 사용 가능한 장비만 갖고 있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맥아더 장군이 워싱턴에 보낸 편지에서 썼듯이 “유일하고 희망 없는 희망은 준비되지 않은 부대를 전장에 보내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습니다.
” 그러나 후속 부대는 설정된 절차에 따라 전쟁 계획을 수립했으며 작전 배치 준비를 완료해야 했습니다.
미국의 주력 전력으로 준비된 제40보병사단 역시 인력과 조직, 장비는 물론 기본 무기 훈련과 특수 훈련까지 철저하게 점검해야 했고, 이 과정에 1년 6개월이 걸렸다.
따라서 1951년 2월 24일에 파병준비명령이 내려졌으나 실제로는 1952년 2월에 한반도에 파병되었다.
‘제40사단 해외주둔 이동상의 문제’에서 파병준비과정의 문제점 미군은 한반도 파병을 준비하면서 야전부대가 겪은 어려움과 교훈을 정리·정리했다.
‘보병 40사단의 해외 주둔 문제(1951년 6월 15일)’라는 제목의 비밀문서다.
1981년 기밀해제된 이 문서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어떤 어려움에 직면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첫째, 병력 모집과 교육훈련에 문제가 발생했다.
1950년 9월 1일 현재, 제40보병사단은 연방정부의 명령에 따라 9,866명으로 증원되었다.
9월 6일, 우리는 배치 준비를 위해 캘리포니아의 캠프 쿡(Camp Cooke)에 입성했습니다.
10월경 병력은 10% 증가(총 19,921명)했고, 1951년 초 11주간의 기초훈련을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팀 차원의 전술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1950년 11월 병력수는 12,065명으로 계획보다 적었다.
11주간의 기초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2월에도 정원이 채워지지 않아 교육훈련 부담이 가중됐다.
교육훈련을 전담하는 부대와 병사 규모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기본훈련과 팀 단위 전술훈련을 동시에 실시해야 했다.
결국 나중에 모집한 인원들은 6주간의 단축훈련 이후 곧바로 팀 단위 전술훈련을 실시하려 했으나, 미 육군 참모부는 대신 기본훈련 기간을 14주로 연장하라고 지시했다.
인사·행정 분야도 어려움을 겪었다.
본토에서 일본 기지로의 병력 이동 준비 완료 날짜는 당초 1951년 3월 23일로 설정됐다(나중에 28일로 연기됐다). 이를 위해 3월 15일부로 인사 및 행정 업무(승진, 부대 이동, 강등 등)를 종료하기로 결정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까지 각종 인사 및 행정 업무가 계속됐다.
신분증 촬영과 신분증 발급을 위한 혈액형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출국 전에만 완료가 가능했습니다.
게다가 파병 전에 콜레라, 흑사병, 장티푸스, 황열병 등의 예방접종을 해야 했지만, 1만 명이 넘는 병사들에게 각기 다른 시간에 4번의 주사를 놓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나중에 흑사병과 황열병은 제외되었습니다.
정보와 작전도 매우 어려웠습니다.
병력 이동 일정 등 치안 유지도 어려웠지만, 작전의 가장 큰 문제는 ‘생존’이었다.
근접전투, 돌파, 개인화기 운용 등 실전에 적합한 훈련을 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밤낮으로 훈련할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규정을 위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행정업무에서는 구현 내용과 문서가 일치하지 않아 항상 혼란이 발생했다.
물류 분야에서도 어려움은 계속됐다.
해외 파병을 위한 보급품, 보급품, 운송을 신청할 행정 양식이 부족하거나 부재했습니다.
육군 규정에 명시된 통일된 행정양식을 찾아서 인쇄하는 데만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포와 일반무기, 차량의 생산과 유지관리 절차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고, 충분한 부품과 부대자재를 준비해야 했다.
이를 위해 베니시아 아스널은 24시간 운영됐다.
처음부터 통신 장비는 운영에 필요한 품질과 수량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또한 운송 및 운송 중에 많은 통신 장비가 손상되었습니다.
마침내 제대로 된 통신 장비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은 한반도에 도착한 뒤에야 가능했다.
한국과의 또 다른 인연, 가평 시저중학교 건립 미 40사단도 다양한 민정활동을 통해 한미 우호증진에 기여했다.
대표적인 예가 1952년 개교한 ‘가평 시저 중학교(현 가평 고등학교)’의 설립과 지원 활동이다.
1952년 경기도 가평에 주둔하는 동안 사단장 조셉 클레란트(Joseph Clelant)는 150여 명의 학생이 한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았다.
텐트. 밤낮으로 총성이 들리는 전쟁 속에서도 배움의 열정에 감동받은 사단장과 부하장교, 15,000명의 장병들이 성금을 모아 이 학교를 지은 것을 보았습니다.
학교 이름은 1952년 금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케네스 카이저 주니어(Kenneth Kaiser Jr.) 중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학교 건축 이정표에는 ‘미 40보병사단 병사들이 한국의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학교’라고 적혀 있다.
또한 학교 내에 ‘시저 역사박물관’을 조성해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학생들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으며, 가평고와 미군의 관계를 기억하기 위한 40사단 기념품도 전시하고 있다.
1954년 제40사단 장병들이 장학금을 모아 축며 첫 졸업식이 거행됐다.
이후 미 40보병사단과 보훈회 등은 매년 시저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장학금을 보내왔다.
미 제40보병사단 한국전 참전용사협회는 2022년 공식적으로 해체식을 거행했다.
이는 참전용사들이 모두 나이가 많아 더 이상 행사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미 제40보병사단 본부가 위치한 로스앤젤레스의 여러 기관들이 참전용사들의 업적과 공헌을 조명하고 칭찬하고 있는 가운데, 한 지역 신문은 “미국의 참전 용사들 40사단은 한미 양국의 굳건하고 굳건한 유대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글 남보람 사진 남보람 편집/디자인 심상욱 일병 대한민국 육군 블로그 아미누리